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라는 책을 읽었다. 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다들 읽어봤을것 같다.

책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옛날 인도 어딘가에 “싯다르타” 라는 사람이 살았다. 싯다르타는 승려 집안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수 많은 스승에게서 교육을 받게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가르침에 한계를 느끼고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친구 “고빈다”와 함께 고향을 떠난다.

그는 깨닫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아버지와 스승들은, 즉 박학다식한 브라만의 승려들은 이미 그들의 지혜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거의다 그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을. 그들은 그들의 지식예 전부를 이미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그릇에 쏟아부어버린 셈인데도, 자신의 그릇은 채워지지 않고, 정신은 미흡하고 영혼은 불안정하며 마음은 평온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버지도, 현자인 스승들도, 성스러운 제식의 찬가도, 브라만들과 그의 성전은 모든 것을 알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며 무한히 많은것을 알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자, 단 하나 중요한 자인 유일자를 모를진데, 이 모든 것을 안다 한들 그것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가장 지혜로운 자들의 모든 지식이, 마치 벌들이 모은 꿀 처럼 순수하게, 마술적인 언어 속에 응집되어 있었다. (…) 하지만 이 심오한 지식을 단순히 깨닫는 데 그치지 않고, 삷으로 체험하는 데 성공한 브라만은 어디 있는가? (…) 그토록 박학다식한 아버지는 과연 열락 속에 살고 있는가? 아버지 역시 아직도 구도하는 사람, 갈구하는 사람에 그치지 않는가?

그렇게 고향을 떠나고, 숲속의 사문을 따라 고행을 통해 자아의 초월을 느끼러 간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잠시간 자아에서 떨어졌을 뿐이지, 결국 본인의 자아로 돌아오게 된다. 이에 다시금 한계를 느끼게 된다. 다시금 친구 고빈다와 함께 사문을 떠나 “왼성자”라고 불리는 고타마 붓다에게로 가게 된다. 붓다의 설법을 듣었으나, 그의 설법 또한 자신을 채우기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당신께서는 붓다라는 것을, 당신께서는 목표에 도달하시었다는 것 저는 한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독자적인 구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명상을 통하여, 참선을 통하여, 인식을 통하여, 각성을 통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걷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설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설법을 통하여 해탈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당신 자신의 깨달음의 순간에 일어난 일을 언어와 가르침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일러주고 전달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각성자 붓다의 가르침은 많은것을 내포하지만, 한가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몇십만의 구도자 중에서 오로지 세존께서만 체험하신 비밀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즉, 말을 통해서는 “붓다”가 했던 체험을 고스라니 전해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고빈다는 붓다에게 남지만, 싯다르타는 붓다를 떠나게 된다.

나의 친구, 고빈다, 이제 너는 너의 길을 내디뎠지. 너의 길을 선택했어. 너는 항상 나의 친구였어. 항상 나의 뒤를 따랐지. 때때로 나는 이렇게 생각했네 - 고빈다도 역시, 나 없이 자신의 영혼으로, 혼자서 자신의 발걸음을 내디딜 때가 있지 않을까? 보라. 이제 너는 한 남자가 되어 너 스스로 너의 길을 택했네.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를.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를!

그렇게 붓다를 떠나게 되며 무엇이 부족한 것이었는지 생각한다. 수 많은 말과 지식을 얻었지만 그들이 가르쳐 주지 못한것은 자아 라는것을 알게됐다. 그는 자아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그것은 자아를 기만한 것이고 도망쳐 숨은것임을 알게 됐다.

나는 알지 못하는 자아의 심부에서 모든 층의 핵을 찾아내려고 나의 자아를 토막내어 그 껍질을 벗겨버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하여 나는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

자아를 알기 위해 방항산 세상속 생활에 실제로 몸을 담군다. 아름다운 기생 “카마라”에게서 사랑의 기술을, 상인에게서 부와 허세를 배운다. 그렇게 속세의 삶에 깊어진다. 도박까지 손을 댄다. 어느 순간에 자신이 경멸하던 소인배의 삷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그저 어린애의 유희로 보며 경멸하게 된다. 자신 스스로를 경멸하게 되며 속세의 생활에서 도망친다.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 했으나, 그의 청년 시절의 기억과 강의 음성이 그를 막는다. 그후 뱃사공 바수데바를 만나 조수로서 살게 된다. 몇년 뒤, 임종을 맞은 기생 “카마라”와 마주치며 본인에게 아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아들을 데려있으면서 부성애의 번뇌를 겪는다.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는 상실감도 느끼게 된다. 떠나간 아들을 찾기위해 도시까지 뛰어가고, 원래 살던 곳 까지 가게 된다. 그 곳에서 속세의 쾌락에 대한 정신적인 오만 또한 사라지게 된다.

자신을 이 장소에 까지 몰고 온 그 갈망은 어리석은 것이었음을. 자기로서는 아들을 도와줄 수 없으며, 아들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마음속 깊이 하나의 상처 처럼 도망친 아들에 대한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상처는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주어진게 아니라, 상처가 꽃이 되어 찬연하게 빛나게 될 것임을 느꼈다.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이 “사실은 자신이 경멸했던 소인배의 삶”을 지냈다는것을 깨닳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모든것이 사실은 하나임을 깨닫는다.

비록 그가 완성의 경지에 가까이 와있는 몸이라 할 지라도, 소인들이 형제처럼 느껴졌고, 그들의 허영심, 탐욕, 가소로운 행위들이 가소록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사랑하게 되었고, 심지어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인간들이 그것들로 인하여 살아간다는 사실을, 그것들로 인하여 무한한 것을 이룩해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결여된 것이 없었다. 사고하는 지자가 그들보다 나은 점이란 단 한가지, 실로 극히 적은 일, 의식하고 있다는것, 사유한다는 것 뿐, 그 밖에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들도 현자에 못지 않았고, 때로는 현자보다 훨씬 우월했다

시간이 지난 후, 옛날에 해어졌던 고빈다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고빈다에게 몇가지 조언을 하게 된다.

스님께서는 너무 지나치게 (원하는 것을 = 초월을) 구하는 것은 아닌가요? 구하기에 전념한 나머지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모름지기 누구나 구할 때에는 그의 눈이 다만 구하는 물건에만 쏠리어 아무것도 발견 못 하고 아무것도 자기 안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기 십상이지요. 구하는 대상만을 생각하고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구한다 함은 하나의 목적을 갖는 것이지요. 발견한다 함은 자유롭게 열려 있는 상태요, 목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스님이시여, 당신은 아마도 과연 구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의 목적을 향해 애를 쓰며 눈 앞에 가까이 있는 많은 것을 놓치니까 말씀입니다.

내가 발견한 것을 말하는 걸세. 지식은 전달할 수 있어도 지혜는 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고, 지혜롭게 살 수 있고, 지혜의 힘을 입어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지혜를 써서 기적을 행할수 도 있지만, 지혜를 말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네.